독립운동 지지한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独立運動を支持した日本人
일본인이길 부끄러워한 일본의 양심. 암울한 일제 치하 피압박 식민지 사람들의 손을 잡아준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박애의 이상 아래 약육강식의 현실을 없애고 이를 실행할 철학을 갖기 위해서는 학식과 장기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약자 편에 서기 위해 법학을 배운 그는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1911년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할 만큼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1919년 2·8독립선언을 이끈 최팔용과 백관수의 법정투쟁을 도운 것을 계기로 일본 내 노동운동, 농민운동, 수평운동은 물론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도 직접 나설 것을 천명했다. “앞으로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자기혁명의 고백’, 1920년). 차별받는 민중을 위한 변호사를 자임한 그에게 민족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여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이 통절하게 우리 일반 무산계급의 마음을 울리고, 조선민중이 철저한 무산계급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적기』, 1923년)
그는 계급해방을 민족문제 해결의 지름길로 본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이었지만, 계급의식에 함몰된 편협한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이 점은 조선공산당 사건(1927년)을 민족 전체의 저항으로 여긴 그의 시각이 웅변한다. “공산당사건의 진상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이다. 법정에 서 있는 100여 명의 피고는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하는 조선동포를 대표한 최전선의 투사가 적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해방』7-1, 1928년).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정치적·사상적 지향을 달리하는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발물취체벌칙위반사건’(1924년)이나 천황 폭살을 꾀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1926년) 등의 변호도 맡았다.
“식민지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은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농업시설이 개선되어도 그것이 식민지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총독부의 정치는 경찰력을 동원한 일본 본위의 정치이기 때문에 식민지 산업의 수확은 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나는 소위 식민지 정책이란 것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라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우리 민족의 독립 되찾기를 희구한 그의 삶은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앞길을 비추는 희망의 기억으로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10.03.30 19:35 입력 / 2010.03.31 00:43 수정
日本人であることを恥じた日本の良心。 暗鬱な日本統治下の被圧迫植民地人の手をつないでくれた人権弁護士・布施辰治(1880-1953)。 「博愛の理想の下、弱肉強食の現実をなくし、これを実行する哲学を持つためには、学識と長期間の勉強が必要だ」。弱者の側に立つために法学を学んだ布施は弁護士の道を選んだ。 1911年に「朝鮮独立運動に敬意を表す」という見解の表明するほど朝鮮の独立運動を支持した布施は、1919年2・8独立宣言を率いた崔八鏞(チェ・パルヨン)と白寛洙(ベク・グァンス)の法廷闘争を助けたのを契機に、日本国内の労働運動、農民運動、水平運動はもちろん、「朝鮮人の利益のために闘争する事件」にも取り組むことを明らかにした。 「今後‘社会運動の闘卒に他ならない弁護士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を民衆の一人として民衆の権威のために宣言する。 私は主要活動場所を法廷から社会に移す」(「自己革命の告白」、1920年)。 差別を受ける民衆のための弁護士を自任した布施にとって民族は障害にならなかった。 「韓日併合はいかなる美辞麗句で飾っても実際には資本主義的な帝国主義の侵略だった。 朝鮮民衆の解放運動が痛切に私たち一般無産階級の心に訴え、朝鮮民衆が徹底した無産階級解放運動を展開する理由もまさにここにある」(『赤旗』、1923年)
布施は階級解放を民族問題の解決の近道と見た‘日本無産運動の猛将’だったが、階級意識に陥没した偏狭な社会主義者ではなかった。 この点は朝鮮共産党事件(1927年)を民族全体の抵抗と考える布施の見解が雄弁している。 「共産党事件の真相は総督政治の暴圧に反抗するしかない朝鮮同胞全体の事件だ。 法廷に立っている100余人の被告は総督政治の暴圧に反抗する朝鮮同胞を代表した最前線の闘士が敵の捕虜になったものと考えられる」(『解放』7-1、1928年)。 このため布施は自分と政治的・思想的性向が異なる義烈団員の金祉燮(キム・ジソプ)の「爆発物取締罰則違反事件」(1924年)や天皇爆殺を企てた朴烈(パク・ヨル)と金子文子の「大逆事件」(1936年)などの弁護も担当した。
「植民地産業に対する根本的な疑惑は、いくら産業が発達し農業施設が改善されても、それが植民地同胞のためのものではないという点にある。 総督府の政治は警察力を動員した日本本位の政治であるため、植民地産業の収穫は本国へ移送されている。 私はいわゆる植民地政策というものに反対すると同時に、植民地同胞とともに解放を願っている」。植民地支配の本質を見抜き、私たち民族の独立を希求した布施の人生は、ともに生きることを夢見る韓日両国市民社会の前途を照らす希望の記憶として迫る。
許東賢(ホ・ドンヒョン)慶煕(キョンヒ)大学部大学長・韓国近現代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