絵にも四柱八字があれば「夢遊桃源図」ほど数奇な運命の作品も珍しいだろう。東洋絵画最高レベルの傑作という賛辞が過分でない作品だが、今日、日本の地ではあるが伝えられているのは幸い中の幸いだ。もう少しで逆賊謀議の証拠品として利用されるところだったのだから。理由のこうだ。
1447年のある日、世宗(セジョン)の3番目の息子・安平(アンピョン)大君は夢で武陵桃源を見た。そのかすかな記憶の中の恍惚の境地を忘れないよう画家・安堅(アンギョン)に絵を描かせた。3年後の正月初日、安平大君は学者・ソンビ(士人)と鑑賞会を開いた。当代の名筆・安平が表題を書き、金宗瑞(キム・ジョンソ)・成三問(ソン・サンムン)、朴彭年(パク・ペンニョン)・崔恒(チェ・ハン)・李ゲ(イ・ゲ)ら20余人が讃詩を詠じて書いた。夢遊桃源図は詩・書・画の3節が一つになった名品となった。
さらに3年後、首陽(スヤン)大君が癸酉靖難(ケユジョンナン)を起こした。実弟の安平には謀反を企んだという罪目をかぶせ、死薬を送った。安平に仕えていた士大夫も抹殺された。仮に逆臣らの落款が押された夢遊桃源図が首陽大君側の手に渡っていれば、安平が謀逆賛同者を糾合した証拠品にされるところだった。ひょっとすると絵の真価を知った誰かがこっそりと盗んで一人だけで楽しもうとしたのか。
癸酉靖難以降行方が分からなくなっていた絵は、450余年が過ぎた1929年に日本の地で姿を現した。当時の所蔵者だった大阪の商人が学者に絵を公開したのだ。1983年11月現在、鹿児島島津家門の所蔵品、という証明書も添付されていた。島津家は薩摩藩、すなわち今日の鹿児島地方を数百年間支配した領主家門だった。壬辰倭乱(文禄・慶長の役)当時には朝鮮に兵士を率いて来て、南原(ナムウォン)一帯で陶工を捕虜として連れて帰ったりもした。15代目が日本に根を下ろした沈寿官(シム・スグァン)家門は当時の捕虜の後えいだ。しかし1893年以前の行方に関する記録が一切ないため、夢遊桃源図を根拠なく略奪文化財と断定することもできない。物証なく心証だけでは通用しないのが国際法の世界だ。
9月頃にはこの夢遊桃源図がまたソウルで見られそうだ。1996年に続いて4週間の貸与展示が行われることで現所蔵者の天理大学側と協議が行われたのだ。先祖の魂が込められた文化遺産をこのような形でも親見できるというのは幸いだが、借りて見るしかないというのは子孫の立場であまりにも恥ずかしくて申し訳ないことだ。
イェ・ヨンジュン政治部門次長/中央日報 Joins.com
그림에도 사주팔자가 있다면 몽유도원도만큼 기구한 운명의 작품도 드물지 싶다. 동양 회화 최고 수준의 걸작이란 찬사가 과분하지 않을 작품이지만, 오늘날 일본 땅에서나마 전해져 오는 건 요행 중의 요행이다. 하마터면 역적 모의의 증거품으로 몰려 불쏘시개 신세가 될 뻔 했으니 말이다. 사연인 즉 이렇다.
1447년 어느 날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꿈에서 무릉도원을 봤다. 그 아스라한 기억 속 황홀경이 잊힐세라 화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다. 3년 뒤 정월 초하룻날, 안평대군은 학자·선비들과 감상회를 열었다. 당대의 명필 안평이 표제를 쓰고, 김종서·성삼문·박팽년·최항·이개 등 20여 명이 찬시(讚詩)를 읊고 적었다. 몽유도원도는 시·서·화의 3절이 아우러진 명품으로 거듭났다.
다시 3년 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친동생 안평에게는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을 씌워 사약을 내려보냈다. 안평을 따르던 사대부들도 몰살을 당했다. 혹여 역신(逆臣)들의 낙관이 줄줄이 찍힌 몽유도원도가 수양대군 측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안평이 역모 동참자를 규합한 증거품으로 꼼짝없이 몰릴 뻔했다. 혹시 모를 일이다. 그림의 진가를 알아본 누군가가 몰래 빼돌려 혼자서만 즐기려 했는지.
계유정난 이래 행방이 묘연하던 그림은 450여 년이 지난 1929년 일본 땅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소장자였던 오사카 상인이 학자들에게 그림을 공개한 것이다. 1893년 11월 현재, 가고시마 시마즈(島津) 가문의 소장품이란 증명서도 첨부돼 있었다. 시마즈 가는 사쓰마 번, 즉 오늘날의 가고시마 지방을 수백 년 동안 지배한 영주 가문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에 병사를 이끌고 왔다가 남원 일대에서 도공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15대째 일본 땅에 뿌리 내린 심수관 가문은 당시 포로의 후예다. 하지만 1893년 이전의 행방에 관한 기록이 일절 없으니 몽유도원도를 무작정 약탈문화재로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증 없이 심증만으론 통하지 않는 게 국제법의 세계다.
9월쯤이면 이 몽유도원도를 다시 서울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1996년에 이어 4주간 대여 전시키로 현 소장자인 텐리(天理)대 측과 협의가 이뤄진 것이다. 선조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그렇게라도 친견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빌려 볼 수밖에 없다는 건 후손된 입장에서 너무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 中央日報 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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